늦둥이 딸이 중학생 되더니 툭하면 사춘기 ‘유세’를 부립니다.
엄마 껌딱지였던 아이가 몸에 손끝 하나 못 대게 하고요,
비밀은 왜 그리 많은지 방문을 밤낮으로 잠급니다.
요즘은 무슨 말만 하면 “어쩔티비 저쩔티비 안물티비 안궁티비
우짤래미 저짤래미” 하는 통에 정신이 다 혼미하지요.
(이 해괴한 주문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시면 뉴스레터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엄마랑 오천구백구십구 살까지 함께 살 거야”라던 딸아이의 배신에
까딱하면 빈둥지증후군에 걸릴 뻔했던 제가 가까스로 소생한 것은,
뜻밖에도 애니메이션 한 편 덕분입니다.
‘귀멸의 칼날’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2020년 한 해 일본에서만 만화 원작이 8천만부 팔려나간 메가톤급
베스트셀러인데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넷플릭스에 걸린 이 시리즈를
딸애가 함께 보자고 제안한 겁니다.
“피곤해!” 소리가 혀 끝까지 올라왔지만, 얼른 마음을 고쳐먹었지요.
아이가 엄마를 ‘불러준’ 게 얼마만인가 싶어서. 마침 관람 등급이
부모의 시청 지도가 필요한 터라 과자 하나씩 들고 소파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작품은 전혀 제 취향 아니더군요. 사람 잡아먹는 혈귀를 물리치는 영웅들
이야기인데, 혈귀의 등급과 서열은 왜 그리 복잡하고, 이를 잡는
귀살대원들은 얼굴과 이름이 마구 헷갈리니 2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하품이 쏟아집니다.
천근만근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어찌어찌 20화 넘는 시리즈를 나흘에 걸쳐
완파했는데요, 이후로 엄마를 대하는 아이의 표정과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주인공 ‘탄지로’를 ‘깐도리’라 부르고 줄거리도 엉뚱하게 알고 있는
엄마가 우스운지 등장인물 계보도를 그려가며 설명도 해주고요,
여자 캐릭터들 노출이 너무 심하다 지적하는 저에게 “엄마도 페미야?”
물어서 젠더 갈등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지요.
게임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방법은 부모가 그 게임을 같이 하면서
이야기 나누는 거라더니, 사춘기 자녀와 잘 지내는 첫걸음도
아이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함께 즐겨보는 것이더군요.
그걸 둘째 키우며 깨달았으니 빵점 엄마지요?/202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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