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다리 개통으로 육지와 연결… 다채로운 비경 가진 섬
붉은빛에 가까운 강렬한 색감의 바위 너머로 실미도가 차분히 자리 잡고 있다.
일제 강점기 무의도는 새우잡이와 어업 중심지였다.
‘천명의 집을 찾아가니, 공씨는 얼빠진 사람같이 부엌에서 멀거니 바다만 내다보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달려와 손을 꼭 붙들고 “선생님 그렇게 나가기 싫다는 놈을, 그렇게 나가기 싫다는 놈을…” 할 뿐, 말을 잇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1941년 쓰인 함세덕 작가의 희곡 <무의도 기행>이다. 강원도에서 농사를 짓다 여의치 않아 무의도로 터전을 옮긴 부부 낙경과 공씨는 3남1녀 중 두 아들을 바다에서 잃고, 딸은 배 수리비 마련을 위해 중국 유곽에 팔아넘긴다.
셋째 아들 천명은 형들의 죽음을 목격하였기에 바다를 죽음의 공간으로 여겼다. 먹고 살기 위해 아들을 고깃배에 태우려는 부모와 기술을 배워 육지에 정착하려 했던 천명은 하루가 멀다 하고 충돌하게 된다. 결국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억지로 배를 타게 되었으나, 풍랑을 만나 죽게 된다.
서해 낙도에는 가난에 쪼들려 실제로 딸을 중국 뱃사람에게 팔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수 십 년 전만 해도 어부들은 열악한 배를 타고 위험한 도박 같은 고기잡이를 해야 했다. 농사지을 땅이 없는 무의도 같은 섬에서 산다는 건, 뼈저린 가난을 타고 나는 것이었다.
무의도 북쪽 해안선을 잇는 데크길. 무의도 트레킹 둘레길 A코스이며, 실미도와
무의도 해안선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무의도 트레킹 둘레길 B코스의 전망대에 서면 호룡곡산과 국사봉 능선이 드러난다.
새로 생긴 해안 둘레길… 발리에 온 듯
2022년 무의도 기행에 나선다. 무의대교를 지나자 다른 바다가 살고 있었다. 영종도는 인천국제공항 탓에 도시 이미지가 강했다. 다리를 건너자 차창 밖에서 스며드는 바람이 문득 촉촉해져 있었다. 무색무취의 바람이 서늘하고 촉촉하게 질감이 바뀌어 있었다. 옅은 소금 냄새와 풀 냄새가 입도를 환영한다며 푸근한 인사를 했다.
무의도는 2019년 다리가 개통되며 대중적인 섬 여행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섬 크기에 비해 볼거리가 다양한 것이 특징인데, 산행 명소인 호룡곡산, 영화로 유명해진 북파공작원 훈련 장소 실미도, 산책 삼아 걷기 좋은 둘레길이 있는 소무의도, 모래해변과 갯벌·해안 데크길 풍경이 일품인 하나개해변, 백패킹 성지로 떠오른 무의도 세렝게티까지 구석구석 다양한 매력을 품고 있다. 등산, 여행, 걷기, 낚시, 백패킹, 차박, 드라이브까지 모든 면에서 다재다능한 섬이다.
입도하자마자 차를 세우고 산행 채비를 한다. 인천이 고향은 아니지만 이곳 섬들이 고향처럼 친근하다는 해병대 대위 출신 고현종씨와 인천관광공사 신유나 주임이 배낭을 둘러메고, 스틱을 펼쳐 든다. 최근 데크길을 조성해 조금 생소한 ‘무의도 트레킹 둘레길’을 찾았다. 무의도 북쪽 해안선과 국사봉 기슭을 걷는 걷기길로, 국사봉 고개를 넘어 원점회귀하는 코스이지만, 임도를 따라 출발지로 돌아가는 구간 대신 하나개해변까지 진행하기로 했다.
가파른 계단은 엄포에 불과했다. 투명하지만 초록으로 느껴지는 향기가 숲을 가득 메웠다. 능선길 대신 걷기길을 택하자 완만한 오르내림이 친절한 가이드처럼 쉽고 편한 길로 이끈다. 소사나무, 소나무, 노간주, 생강나무, 산초나무, 청미래덩굴, 누리장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가 빼곡하다.
평일이라 파도 소리만 가득할 뿐 말소리는 없다. 최근에 만든 둘레길답게 스토리텔링에도 신경 쓴 모습이다. 임경업 장군이 진을 쳤다는 ‘구낙구지’와 원수와 부딪치는 것마냥 파도가 거센 곳이라는 ‘웬수부리’ 안내판이 재미있다. ‘섬 둘레길치곤 열린 경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쯤 나타나는 바다. 고즈넉한 모래해변에서 시작되는 해안 데크길은 진수성찬처럼 걸음걸음이 감미롭다. 뒤엔 영종도와 무의대교가 보이고, 앞엔 동남아 발리섬에 온 듯 자연미 넘치는 풍경이다.
묘한 부조화를 무시하고 데크를 따라가자, 남태평양 어딘가의 산호초 섬마냥 아리따운 섬이 등장한다. 실미도가 원래 저렇게 예쁘장했나 싶다.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씨와 가을의 심도 깊은 파란 하늘이 어우러져 평소보다 더 화사하다. 누군가 “차로 올 수 있는 인천에 이런 곳이 있었냐”며 감탄하는데, 무의식적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무의도 기사를 몇 번 쓴 적 있어, 여간한 곳은 다 가봤다고 생각했다. 김빠진 출장이라 여겼으나, 처음 보는 풍경이 여행자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북파공작원들의 슬픈 사연이 담긴 곳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실미도는 아늑하니 평화로웠다. 데크 옆으로 붉은빛에 가까운 황토색 바위벽이 장쾌하게 길을 이끌었다. 데크길이 끝나는 곳에서 둘레길은 산쪽 임도가 본 코스였지만, 실미도해수욕장의 수채화 같은 해안선을 두고 갈 순 없었다.
경로를 바꿔 모래사장을 걸었다. 양떼 같은 구름과 에메랄드 원석 같은 바다가 잘 어울렸다. 적막한 모래사장을 신유나씨가 두 팔 벌려 뛰자 앉아 있던 갈매기들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여백 많은 해변과 날아오르는 갈매기가 슬로비디오로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한국영화 ‘만추’의 한 장면으로 추가해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실미도의 작은 숲은 단풍보다 초록이 더 짙었다. 만추 대신 만조였다. 썰물에만 갈 수 있는 섬이었기에, 바닷길 앞에 서서 한동안 실미도를 바라보았다. 바지 걷어붙이고 건너오라 유혹 했으나, 초대에 응하지 못했다.
임도를 따라 둘레길 B코스로 접어들었다. 짙은 숲과 흙이 깔린 임도. 차량보다는 사람이 걷기에 더 어울렸다. 철문과 철조망이 길을 막고 있다. 폐쇄적인 분위기에 돌아가야 하나 싶던 찰나 어촌계 안내문과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보였다. 관광 목적으로 드나드는 건 상관없지만 어패류를 무단으로 채취하는 것은 금한다는 맥락으로 읽혔다.
아름드리 소나무숲과 푹신한 흙길에 긴장이 풀어질 쯤, 홀연히 나타난 모래해변. 누군가 쳐 놓은 텐트 한 동, 떳떳한 야영은 아니지만 그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다시 시작된 데크길, 왼쪽은 붉은 바위벽이, 오른쪽은 실미도가 환상적인 경치를 깜짝 선물처럼 덥석 안긴다. 데크길 끝의 원형 전망대에 서자, 뙤약볕인데도 조망의 즐거움이 쉽게 놓아지지가 않는다.
무의도 트레킹 둘레길 B코스의 백미인 데크 끝 전망대.
무의도와 실미도를 잇는 바닷길. 썰물이 되면 나무 난간 사이로 길이 열린다.
오르막 산길이 분위기를 바꿔 놓는다. 산행처럼 가파른 등산로가 짧게 이어지고 어느 정도 고도를 높이는가 싶더니 완만한 데크길로 안심시킨다. 망망대해를 보여 주는 작은 쉼터가 지루할 만하면 나타나 카메라를 꺼내게 한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색다른 쉼터, 호랑이와 선녀 조형물이 있는 바다 전망대다. 호랑이와 용이 싸웠다는 전설이 있는 섬답게 하늘나라 셋째 공주와 호랑이 설화를 실물 크기 조형물로 만들어 놓았다.
둘레길이 끝나는 곳에 소박한 모래해변이 고요함에 휩싸여 있다. 반짝이는 바다, 서해답지 않게 힘차게 밀려오는 포말의 파도, 매끄러운 살결 같은 모래사장, 압도적인 태양, 외로운 점처럼 해변을 걷는 엄마와 아기, 외국 작가의 소설에서 본 것 같은 풍경이었다. 북아프리카 카사블랑카의 낯선 해변마냥 매력적인 작은하나개해변이다.
해변 끝 소나무 그늘 아래 텐트 한 동이 있어 다가가보니, 은퇴한 60대로 보이는 남성이 캠핑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원래 속해 있었던 풍경인양 잘 어울렸다. 그렇게 무의도에서 무위도식하고 싶었다. 점심을 한참 넘긴 허기가 ‘식당에 가자’고 길을 재촉해 생각으로만 그쳤다.
무의도에서 본 실미도. 북파공작원들의 실제 훈련 장소였던 섬이다.
실미도해수욕장의 바윗더미와 짙은 바다 빛깔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둘레길은 여기서 임도와 산길을 따라 무의대교로 돌아가는 코스이지만, 하나개해변으로 향했다. 툭 튀어 나온 바위지대를 어렵지 않게 돌아서자, ‘우리 섬의 하나뿐인 갯벌’이라 하여 이름이 유래하는 하나개해변이 관광지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한 2시간 고즈넉했을 뿐인데 단체 모임을 온 중년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연인들의 수다가 반갑다.
늦은 점심을 먹고 ‘무의도 세렝게티’로 향했다. 독특한 별명이 붙은 이곳은 최근 수도권 백패킹 성지로 떠오른 색다른 야영 명소다. 찻길이 없는, 오직 2.5km를 걸어야 닿을 수 있는 은밀한 바닷가 야영 터다. 지자체에서 세운 공식적인 야영장이 아닌, 백패킹 마니아들의 입소문으로 스타가 된 장소인 것. 광명항엔 대형 공영주차장이 있고 식당이 많아, 현지에서도 야영객의 출입을 막거나 싫어하는 분위기는 없는 듯했다.
‘무의도 세렝게티’라는 별명이 생긴 백패킹 명소. 남쪽 끝에 있으며 2.5km를 걸어야 닿을 수 있다.
★빽빽이 숲을 이룬 호룡곡산 등산로.
호룡곡산 등산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산길이 이어졌다. 인터넷에 상세히 길안내를 한 블로거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해변과 숲길을 번갈아 오가며, 희미한 듯 선명하게 한 명 걸을 만한 소박한 길이 이어졌다. 해는 뉘엿뉘엿하고, 30분을 넘게 걸었으나 야영 터라 할 만한 곳은 없었다. 일행들은 조용히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피로한 기색이었다.
일행이 의구심을 갖기 전에 빨리 멋진 야영 터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다. 해변 굽이굽이를 몇 번 돌았을까, 이젠 나오겠지 하는 바람으로 돌아들자, 거대한 벽이 있었다. 50m 넘는 바위벽 아래 운동장 같은 너른 분지가 있었다. 평일인데도 5~6동의 텐트가 보였고, 익숙한 듯 자기들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거벽 아래 아프리카 초원 같은 느낌이 살짝 들었다. 아프리카 세렝게티국립공원 이름을 따온 건 지나친 과장이었으나, 노을에 물드는 감미로운 바다는 그런 것쯤 다 이해하게 했다. 풍경이 사람을 너그럽게 하는, 낭만이 있었다.
1941년의 가난하고 위험했던 바다는, 2022년 여행객이 줄을 서는 관광의 바다로 바뀌어 있었다. 더 많은 건물이 생겨나고, 신작로가 생기겠지만, 이것도 계절의 흐름처럼 시대에 맞게 흘러가는 것. 차분한 해변 어딘가 <무의도 기행> 공씨가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자책하며,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을 것 같았다.
하늘에서 본 무의도 트레킹 둘레길 A코스의 해안데크길. 데크길이 끝나는 곳에 실미도와 실미도해변이 있다.
★무의도 가이드
무의도 북쪽 해안선을 이은 ‘트레킹 둘레길’이 볼 만하다. 무의대교에서 걷기 시작해, 작은하나개해변에서 해안선을 따라 하나개해변으로 넘어와서, 식당가에서 점심을 먹고 호룡곡산 산행을 하면, 알찬 도보여행이 완성된다.
둘레길 A코스는 실미도해변을 만나는 곳에서 국사봉 산길로 우회하도록 되어 있으나, 실미도해변을 걷는 것이 더 운치 있고, 걷기도 수월하다. 실미도해변은 사유지이며 정문을 통해 들어올 경우 입장료 2,000원을 내야 한다.
하나개해변에서는 호룡곡산 원점회귀가 가능하다. BAC인증지점인 정상에 오른 후 서쪽 해안선으로 내려서면 볼거리가 다채롭다. 하산 후 해변을 만나는 곳에서 데크 계단을 따라 모래사장으로 내려서면, 하나개해변까지 이어지는 해안데크길이 있다. 800m가량 이어지는 해안데크길은 무의도의 인기 관광 코스다.
무의대교에서 작은하나개해변까지 7.6km, 여기서 하나개해변까지 0.9km이다. 밀물 때는 산길로 넘어가거나 주의해서 해안 바윗길을 넘어가야 한다. 하나개해변에서 호룡곡산 정상을 다녀오는 원점회귀 산행은 5km이다. 정상까지 2km 정도로 멀지는 않지만 가파르다. 둘레길과 호룡곡산을 하루에 둘러볼 경우 14km이며 6시간 정도 걸린다. 둘레길 길찾기는 어렵지 않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엉뚱한 곳으로 빠질 수 있다. 특별부록 등산지도를 참고하고 갈림길에선 이정표를 살펴야 한다.
교통
공항철도 인천공항1터미널역에서 무의1번 마을버스를 타면 된다. 무의대교를 경유해 하나개해수욕장을 거쳐 광명항까지 간다. 둘레길 이용 시 큰무리선착장에서 하차해야 한다. 30~40분 간격으로 운행(06:00~21:00) 한다. 하나개해수욕장에서 마을버스를 탈 때, 광명항행 버스와 영종도행 버스를 구분해 타야 한다. 자가용으로 갈 경우 영종대교 통행료(편도 6,600원)를 내야 한다. /출처 : 월간산(http://s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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