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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대선배스승님추모]아름다운 가을에 96세 김남조 시인 "하늘나라영원안식하소서"

by Hessed헤세드 2023. 10. 11.

★오늘 앵커의 시선

‘사랑의 시인’ 김남조(1927~2023) 시인이 1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평생 19권의 시집을 냈으나 사랑의 시를 가장 많이 쓴데다가 남의 사랑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다. 시인의 별명은 ‘김사랑’. 무엇보다 사랑의 시로 가득한 8번째 시집 《사랑 초서(草書)》(1974)는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문학평론가 김용직 서울대 교수(작고)는 "시인은 사랑을 인간의 영혼을 구제, 고양하는 원초적인 힘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1

사랑하지 않으면

착한 여자가 못된다

소망하는 여자도 못된다

사랑하면

우물곁에 목말라 죽는

그녀 된다

 

2

하늘땅 끝머리

저승만이나 먼먼집에

아침엔

햇빛 나르고

저녁엔

바람 나르고

 

3

너무 굶기면

사랑도 죽네

더욱 물을 삼켜도 가슴 추운

병이 깊어

내 사랑, 사랑이여

눈감았음을

 

-김남조의 <사랑 초서(草書)> 일부

 

몇 해 전 김남조 시인을 찾아 뵌 적이 있다. 2021년 4월 25일 김세중미술관에서다. 그때 휠체어를 타고 계셨다.

시인은 처음 만난 기자에게, 정확하게는 전화 통화만 한 기자에게 자신의 시전집(1983, 서문당)과 시선집(2002, 문학사상사)을 선물로 주었다. 그 무렵, 전국 헌책방에 있는 자신의 옛 시집들을 모으고 있노라고 했다. 자신의 지체와도 같은 시집들을 시인을 뵙기 위해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나눠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을 만나기 앞서 2020년 3월 펴낸 19번째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되어 버린 《사람아, 사람아》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시집 서문인 ‘노을 무렵의 노래’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시작(詩作)은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시는 어떤 맹렬한 질투 같은 걸 가지고 있어서 가령 시인이 어느 기간 다른 일에 몰입하였다가 되돌아오면 시는 철문을 닫고 오랫동안 열어 주지 않았으며 이럴 때 시인은 닫힌 문 앞에 힘겹게 서 있곤 합니다.>

 

평생 시를 써온, 시와 더불어 산 그가, 시 앞에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시를 읽으며 사랑에 관한 시인지 종교시인지, 둘 다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가 바수어져

모래가 되기까진

2억 년의 세월을 요한다

빛과 바람과 시간이 힘을 모아 주면

그리된다 한다

한 알의 모래는

사람보다 칠백만 배의

고령자이다

 

하느님이 바위에서

부서지면서 살아라

부서지더라도 살아라고

풀무를 돌리시며

2억 년 동안 지켜보신다

 

-김남조 시인의 <바위와 모래> 전문

(시집 《사람아, 사람아》 중에서)

 

 

책을 읽는다

책갈피 사이사이로 흐르는

사념의 혈류

 

나의 글은 어떤가

외출복을 차려입은 말들은

세상에 내보내고

상처 깊거나 죄의식에 멍든 말은

늑골갈피 속에 묻어 둔다

덧없어라 옷 없어 세상에 못 나가고

늙어 버린 말들

 

글의 진정성은 무엇인가

묻고 더 생각한다

문학이여

내 한평생길 가고 또 가도

출발 지점에

다시 와 있구나

 

-김남조의 시 <책을 읽으며> 전문

(시집 《사람아, 사람아》 중에서)

 

기자는 시인이 1983년 펴냈다가 2017년 다시 간행한 《시로 쓴 김대건 신부》라는 시집을 갖고 있다. 이 시집은 원로시인 이근배 선생에게 선물로 받았는데, 읽고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신앙을 떠나 어떤 영적인 숭고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말할 수 없어라

온 세상의 말로서도

이 신비 나타낼 수 없어라

신의 특별하신 간택이

만인 중에서 가려 뽑은 자에게

성령의 불의 인(印)을 찍으심을

(....)

그 넘치고 모자람,

아름답고 미움을,

또한 의와 불의로

아직 어리고 흔들리며

덜 데워진 사람의 마음들을

잠잠히 지켜보는

성실한 염려와 축원의

김대건 신부, 그를

 

-김남조의 시집 《시로 쓴 김대건 신부》 중에서

 

기자는 시인의 7번째 시집 《설일(雪日)》(1971)에 실린 <설일>을 좋아한다. 소개하면 이렇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김남조의 <설일(雪日)> 전문

1974년 문단 모임에서 서정주 선생과.

1985년 숙명여대 근속 30주년 기념식에서. 이후 8년을 더 교수생활을 하고 1993년 정년 퇴임했다.

김남조 시인은 1955년 2월 중림동 성당에서 김세중 교수와 결혼했다.

1972년 숙대 교정에서 제자들과.

1970년 속리산 산책길에서. 왼쪽부터 곽종원, 박목월, 이해랑, 임원식, 김남조, 이녕희, 김동리, 남관 선생과.

★고(故) 김남조 시인의 연보

 

• 1927년 대구 출생

•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 1951~1953년 마산고등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

• 1953년 서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강사

• 1955~1993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명예교수

• 1990년~2023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한국시인협회 회장

•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장

• 한국방송공사(KBS) 이사

• 방송문화진흥회(MBC) 이사

 

• 국민훈장 모란장(1993)

• 은관문화훈장(1998)

 

• 자유문협상(1958)

• 한국시인협회상(1975)

• 서울시문화상(1985)

•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88)

• 서울세계시인대회계관시인(1988)

• 3·1문화상(1992)

• 대한민국예술원상(1996)

• 일본세계시인제 지구문학상(2000)

• 영랑문학상(2006)

• 만해대상(2007)

• 김달진문학상(2014)

• 가톨릭문학상(2014)

• 정지용문학상(2017)

• 김삿갓문학상(2018)

/월간조선2023.10.10

사람과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힌 김남조(96) 시인이 1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여성 시단의 최고 원로이자, 1000여 편의 시를 쓰며 펜을 놓지 않았던 영원한 현역.

그는 3년 전 낸 마지막 시집 ‘사람아, 사람아’에서 “나는 시인 아니다. 시를 구걸하는 사람이다. 백기 들고 항복 항복이라며 굴복한 일 여러 번”이라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시 ‘사랑, 된다’에선 한평생 씨름했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긴 세월 살고 나서/ 사랑 된다 사랑의 고백 무한정 된다는/ 이즈음에 이르렀다/ …사랑 된다/많이 사랑하고 자주 고백하는 일/ 된다 다 된다’.

고인은 ‘사랑’의 가치를 역설하는 작품으로 차갑게 식은 한국 사회에 온기를 불어넣어 왔다.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후쿠오카 규슈여고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도중인 1950년 연합신문에 두 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53년 첫 시집 ‘목숨’을 시작으로, 열아홉 권의 시집과 다수의 산문집, 평론집 등을 냈다.

초기 작품에선 인간성과 생명력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6·25전쟁 이후 폐허가 된 한국 사회의 상처를 보듬는 한편, 산업화 이후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실존적 고민을 작품에 소환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시인은 후기 작품에 이르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랑을 작품에 표현했다. 모윤숙(1909~1990), 노천명(1911~1957)의 뒤를 이어 한국 현대문학의 새로운 문을 연 시인으로 평가받으면서도, 특히 ‘사랑의 시인’으로 불렸던 이유다. 숙명여대에서 문학을 가르쳤고, 한국시인협회장, 한국여류문학인회장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은관문화훈장(1998), 만해대상(2007) 등을 받으며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시인은 생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으나, 6·25전쟁을 거치며 형제가 모두 죽었다. 아버지도 어린 시절 사망,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10대에 폐결핵에 걸리며 가톨릭 신앙에 눈을 떴다. 결혼도 절망적 삶을 바꾸지 못했다. 종교 조각 분야의 거장 김세중(1928~1986) 서울대 미술대 교수와 결혼했지만, 그가 사망한 이후로 네 자식을 홀로 돌봐야 했다. 노년에는 심장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치료받았다. 그럼에도 “노년의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숨 쉬는 일이 위대하고 가슴 벅차게 느껴진다”고 말했던 시인이다. 열일곱 번째 시집 ‘심장이 아프다’(2013)에 수록된 시 ‘혈서’에선 자신의 시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은밀한 혈서 몇 줄은/ 누구의 가슴에나 필연 있으리/ …사람의 음성은/ 핏자국보다 선명하기에’.

90이 넘은 나이에도 펜을 놓지 않으며, 작품을 끊임없이 발표한 힘의 근원이 엿보이는 대목.

그의 시는 기도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종교적 경건함을 노래하며, 수많은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며 노래한 ‘편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고 노래한 ‘설일’(雪日)을 비롯해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진 시편이 다수다.

생의 말년에 주목한 것은 ‘자연’이다. 그는 시집 ‘심장이 아프다’에서 “모든 사람, 모든 동식물까지가 심장으로 숨 쉬며 살고 있는 이 범연한 현실이 새삼 장하고 아름다워 기이한 전율로 치받으니, 나의 외경과 감동을 아니 고할 수 없다”라고 썼다. 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돌이켜보며 말했다.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심장이 아프다’ 중에서).

그는 2020년 마지막 시집을 낸 뒤 본지 인터뷰에선 “시인이 시를 쓰는 게 전부가 아니고 시를 읽는 것도 중요하니 못다 읽은 책을 읽고, 못다 들은 음악 들으면서, 좀 헐렁하게, 얼마 남지 않은 생일수록 그 신비를 다양하게 느끼고 생각하고 싶다”라고 했다. 이제 그는 또 다른 생의 신비를 찾아 떠났을 것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유족으로 딸인 김정아 가천대 불문과 명예교수, 아들인 김녕 김세중미술관장·김석 디자이너·김범 설치미술가. 발인은 12일이다./조선일보20231011

시 1000여편 남겨… 향년 96세
시를 쓸때는 언제나 두려움 느껴”
시인협회장-여성문인회장 등 역임

“긴 세월 살고 나서/사랑 된다 사랑의 고백 무한정 된다는/이즈음에 이르렀다”(김남조 시 ‘사랑, 된다’에서)

‘모든 시가 사랑을 노래한다’는 믿음으로 1000여 편의 시를 썼던 ‘사랑의 시인’ 김남조 숙명여대 명예교수(사진)가 10일 영원히 펜을 놓았다. 향년 96세.

6·25전쟁의 혼돈 가운데 ‘어느 산야에도 구르는 돌멩이처럼 목숨만 갖고 싶다’고 읊조린 20대 시인은 아흔 살이 넘어서도 시집을 내는 등 삶의 깨달음과 사색을 꾸준히 시어에 담아냈다. 시인은 “1000편의 시를 썼다 해도 1001번째 시를 쓸 때 언제나 두려움을 갖고 임하게 된다”고 했다.

오랫동안 심장이 좋지 않아 치료를 받았던 그는 2020년 펴낸 19번째이자 마지막 시집 ‘사람아, 사람아’(문학수첩)에서 “결국 사람은 서로 간에 ‘아름다운 존재’라는 긍정과 사랑과 관용에 이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며 사랑을 긍정했다. 2013년 17번째로 펴낸 ‘심장이 아프다’에선 “노년의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숨 쉬는 일이 위대하고 가슴 벅차게 느껴진다”고 했다.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난 시인은 일본 규슈(九州)에서 여학교를 마쳤고 1951년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48년 대학 재학 시절 ‘연합신문’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발을 내디뎠다. 마산고교,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은 뒤 성균관대, 서울대 강사를 거쳐 1955∼1993년 숙명여대 교수를 지냈다. 한국시인협회장, 한국여성문학인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1992년 3·1문학상, 1996년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부문 예술원상, 1998년 은관문화훈장, 2007년 만해대상 문학부문상을 받았다. 남편 김세중 조각가(1928∼1986)와 함께 지내던 서울 용산구 효창동 자택을 2015년 리모델링해 문화예술공간 ‘예술의 기쁨’을 개관했다.

신달자 시인(80)은 “내가 1965년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을 때부터 60년 가까이 스승으로 모셔 온 아름다운 분”이라고 했다./동아일보